예쁘고 멋있는 걸 좋아한다.
간지 나고 뽀대 나는 것을 좋아한다.
손으로 뭐 만들어내는 것쯤이야 하나도 어려울 게 없어서 배우고 싶은 건 다 배우고 살았다.
그러던 어느날, TV에서 전통머리 장인에 대한 영상을 보게 되었다.
사극에서 볼 수 있는 아름답고 화려한 머리를 다루는 사람이었고, 또 돈을 엄청 번다고 했다.
그래. 저걸 배워보자! 결심하고 즉시 네이버를 켜서 검색해보았다.
내가 원래 찾아가고 싶었던 사람은 연락처가 너무 불분명했다. 한 시절 잘 나가다가 이제는 소리 없이 무너진 느낌이 들었다. 연락도 잘 되지 않아서 포기.
그다음, 뭔 협회니 뭐니 해서 자기 이름을 내걸고 핸드폰 번호를 공개한 사람을 어렵지 않게 찾아갔다.
처음부터 너무 순조로웠다. 머리 기술을 배우기 위해 나는 만반의 준비가 되어있었고 두려울 것이 없었다.
족제비 같은 눈을 반짝이며 처음 찾아온 나를 요리조리 뜯어보던 그 사람은 머릿속으로 참 많은 생각을 했던 것 같다.
나를 바라보며 '저 인간에게서 얼마나 빨아먹을 수 있을까...' 하고 이미 첫 만남부터 진단을 내리고 있었던 거다.
그 인간이 교육비 명목으로 돈을 달라는 대로 주었고, 미친 듯이 시간투자를 해서 기술을 배웠다. 교육비로만 거의 천만 원 가까이 들어갔다. 재료비는 따로. 피를 토하며 일해서 받은 월급을 다 쏟아부었다. (이것 때문에 신랑이랑 미친 듯이 싸웠다.)
지금 생각해봐도 전혀 체계적이지 않은 손장난 같은 기술을 배우기 위해 너무 과한 투자를 했다는 생각이 든다.
그 당시 나에게 주어진 준비물이라고는... 빤스고무줄, 나무젓가락, 다 스러져가는 가발 스탠드, 대충 잘라서 만들어진 지저분한 달비(심지어 달비를 밟고 다니기도 하는 것을 보았다;;), 그리고 여러 가지 조잡한 액세서리들 정도였다.
물론, 그 인간을 만나서 머리 기술을 간단히라도 배울 수 있었지만
정말... 이런 물건으로 저 장대한 옛날 헤어스타일을 만들어낸 것일까 하고 의구심이 들었던 적이 한두번이 아니다.
웬 듣보잡 대학에서 받은 박사학위 논문을 나에게 내밀며 본인의 연구성과라고 보여주었다.
한 장 한 장 찬찬히 읽어보았다.
열정은 인정한다. 미안하지만 거기까지.
맞춤법이며 글의 논리적 전개는 아예 눈을 감아버리는 편이 나았다.
커다랗고 무거운 달비를 매어달때 사용하는 끈이 왜 시커먼 빤쓰고무줄인지.. 그 이유에 대해서는 아무 설명이 없었다.
가체머리에 왜 싸구려 철제 U핀을 이리저리 꽂아대야 하는 건지, 얼기설기 꽂힌 U핀 때문에 커다란 머리가 왜 덜컹거려야 하는지 도무지 그 이유를 알 수가 없었다.
역사적 고증이 전혀 없는 이러한 작업태도는 정말 많은 사람들로부터 공격대상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알고나 있는 것인지 의아했다.
나중에 그 이유를 알게 되었다.
그 인간은... 그 인간이 기술을 배웠던 선생이 했던 모든 것을 그대로 베껴왔기 때문이다.
점잖게 말해서 베낀 거지... 그 인간은 '훔쳐온' 것이었다.
그 인간의 스승이라는 사람이 지은 책들을 다 구입하여 살펴보니 이 점은 더 확실해졌다.
스승에게 뒤통수를 맞고 배신당했다고 억울해하던 그 인간...
그래, 물론 속상한 점이 있었겠지...
하지만, 스승과 안좋게 헤어졌어도 스승이 이룬 성과를 그대로 베끼는 행동을 해서는 안된다.
거지 같은 스승이라도 그 배움을 통해 스스로 성장해서 나만의 예술세계를 만들어내는 게 맞는 거지.
스승을 욕하면서 똑같이 답습하는 행동을 거듭하면 할수록 그 인간은 후퇴할 수밖에 없다.
지금도 간간히 포털사이트에서 찾아볼 수 있는 그 인간의 작품도... 처음에 감동했던 그 아름다운 기술이 날이 갈수록 빛이 바래지는 느낌을 받는다.
엄청난 교육비를 지불하며 서글픈 머리 기술을 익히고 난 뒤, 그 인간은 내가 이용가치가 있다고 느껴졌는지 자기와 계속 함께 하자고 하더라. 알고 보니 그런 식으로 사람들의 피를 빨며 살아온 사람이었다.
전통머리에서 그렇게 경력이 많다는 인간이... 충직한 가방모찌하나 없는 것이 정말 이상했지만 뭐 그런가 보다 했다.
고독해 보였던(고독함을 가장했던) 그 인간의 병신 같은 가방모찌 역할을 하느라 나의 2년을 미친 듯이 쏟아부었다.
바보 같은 나의 충직함을 이용해 본인이 하기 싫은 온갖 잡 일에 나를 굴리기 시작했다.
그때부터 나의 암세포가 스멀스멀 자라고 있었던 것 같다.
지금 생각해도... 가슴이 먹먹해지고 숨이 탁! 막히는 슬픈 기억이 많이 떠오른다.
회사를 설립하네 어쩌네 하면서 투자금까지 사기를 당한 나...
난 그 돈을 메꾸기 위해 다시 일년을 뼈 빠지게 고생해야 했다. (신랑이 알면 날 죽이려고 할 것이다.)
하지만 괜찮았다.
이때까지는 그래도... 그 인간을 스승이라고 생각했었다.
어느 날, 홈텍스에 들어가 이것저것 살펴보다가 우연히 뭔가를 발견했다.
그 인간이 나의 개인정보를 이용해서 허위로 임금지급명세서를 신고하여 불법으로 세금 감면을 받으려 한 것이다.
아.... 그 때의 기분이란..... 진짜.... 말로 설명할 수 없다.
난... 한 시간 동안 멍하니 창 밖만 바라보고 있었다.
정말 아무 것도 할 수가 없었다.
3년 간의 피땀 어린 나의 소중한 기억들이 와장창 깨지며 산산조각 나서 시커먼 절벽 아래로 떨어지는 기분이었다.
그냥, 모든 것이 끝났다.
나의 전통머리 기술이 본격적으로 성장하게 된 것은 그 이후부터이다.
모든 것을 잊고, 전통머리와 관련된 그 누구와도 소통하지 않았고, 마음의 문도 닫고 오직 작업에만 몰두했다.
아직도 할 것이 많고 어설프다.
어제의 작품은 내일의 나를 부끄럽게 할 것이기 때문이다.
문득 그런 의문이 들었다.
그 인간의 스승이라는 사람은 누구에게서 전통머리 기술을 배운 것일까?
엄청 나이드신 궁녀에게서 기술을 전수받았다고 인터뷰한 기사가 어렴풋이 기억난다.
그 궁녀 할머니는 전통머리 기술을 배우겠다고 찾아온 그 인간의 스승을 위해 노구를 이끌고 어렵게 어렵게 기술을 전수해주셨을 것이다.
그리고 그 할머니는 배움의 대가를 따로 요구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이건 마음으로 느낄 수 있다.
그 인간의 스승은, 궁녀 할머니에게 배운 기술을 나름대로 확장하여 많은 사람들에게 전통머리의 세계를 알리는 역할은 했지만 여러 가지 속물적인 행동이 거듭되어 끝이 별로 좋지 못했던 것으로 안다.
그 인간의 스승에 대해 회자되는 인간적 면모를 살펴보니 그리 숭고한 인간은 되지 못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숭고하지 못한 인성은 내가 잠시 스승이라고 생각했던 그 인간에게까지 대를 이어왔고.... 난 오롯이 그 대물림에 의해 죽을만큼 엄청나게 두들겨 맞았다.
악습을 멈추기 위해서는 누구 한 명이 피를 토하는 각오로 그 더러운 대물림을 끊어내야 한다고 한다.
배움이 낮고 자기성찰이란 아예 찾아볼 수도 없으며 서로 베끼기를 좋아하는 천박한 근성의 그 세계 인간들 중 누구하나 그럴 사람이 없을 것이다.
홀로 뚝 떨어진 외딴 섬에서 머리를 만지고 있는 나는 그 어디에서도 존재감이 없다.
내가 원래 속해 있었던 곳에서는 그저 특이한 인간일 뿐이며, 승냥이처럼 내 뒤를 후렸던 이 업계 사람들은... 솔직히... 너무 무섭고 징그러워서 다시는 가까이 하고 싶지 않다. 가까이 했다가는 또 물어뜯길 것 같기 때문이다.
조용한 새벽녘이면 늘 고민에 휩싸인다.
'그만둘까...'
인간관계며 하는 일이며 마음이 너무 힘들 때마다 포기를 거듭했던 나...
이번에 그 힘듦이 다시 찾아온 것인가...
경계선에 멈춰서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나를 바라본다.
만약... 내가 가진 기술을 누군가에게 전해줄 수 있는 기회가 생긴다면,
내가 당했던 그런 일이 없도록,
그 누구도 마음의 상처를 받지 않고,
전통머리 기술을 잘 받아들여 자신만의 세계를 펼쳐갈 수 있게 길을 열어주고 싶다.
완전관해가 되어 새 생명을 얻게 된다면...
그건 하늘이 내게 주는 기회라고 생각한다.
나에게 주어진 소명을 실천하라는 하늘의 뜻일 것이다.
지금은 하늘에 계실 궁녀할머니가 그랬듯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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