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중에 나와있는 한국미술서적은 그 수준이 높아서 줄줄 읽어내려가기 힘들다. 작품마다 전문적인 미술 비평이 들어가 있기 때문에 어지간한 국어능력과 관련 지식이 없으면 일반적인 교양을 신장하는 데는 크게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한의원에 갔다가, 묵직한 서체로 쓰여진 '진경산수화'라는 제목의 책을 보게 되었다. 역시나, 간송미술관에서 출판된 미술책이다. 작품+설명, 이렇게 한 세트로 구성되어 있는데, 적어도 400페이지는 너끈한 분량으로 만들어져 있다.
아래는 해당 서적의 44번 작품, 심사정의 <삼일포>이다.
이 작품의 설명을 살펴볼까?
오로지 순수한 감상을 목적으로 하여 작품의 세밀한 부분을 짚어가며 차분하고 냉정하게 서술한 아주 품위있는 비평문이다.
미술 전공자이긴 하지만... 솔직히 이야기하면, 재미도 없고 나에게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 실용적으로 사용할 수 있는 부분이 하나도 없다는 말이다. 그래도 전공자랍시고 오랜 시간 동안 이와 비슷한 책들을 무지하게 사모았었는데 결국 나의 책장에 즐비하게 꽂혀서 먼지만 쌓여가고 있다. 그 재미있다는 유홍준 교수님의 책도 여러 개 있지만 이 마저도 주인에게 읽혀지지 않아 침대 머리맡에서 무기력하게 뒹굴고 있다.
그런데...
재미삼아 풀고 있는 수능 국어 문제집에서 희미한 빛을 발견한 것이다. 수능 국어 지문에는 다양한 부문의 글들이 많이 수록되어 있는데, 논리적인 구성, 학생들이 읽어서 도움이 될 만한 유익한 내용들, 건전한 소재, 부담 없는 분량 등등 뭐 하나 빼놓을 수 없이 내 마음에 쏙 드는 것 아닌가.
중고등학생 문제집이라고 우습게 생각하지 말자. 어른들 중에 국어능력 2등급 이상되는 사람이 과연 몇 이나 되겠는가? 가슴에 손을 얹고 생각해봐라. 그리고 국어 문제집을 한 번 풀어보라. 절대 만만치 않다.
여기 읽어볼 만한 수능국어 문제집에 수록된 지문을 소개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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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이스토리 고등국어 비문학 독해① 100쪽>
18세기 조선에서는 진경산수화가 유행하였다. 진경산수화는 우리나라의 산하를 직접 답사하고 화폭에 담은 산수화이다. 무엇보다 진경은 대상의 겉모습만을 묘사하지 않고, 대상의 본질을 표현한 그림임을 강조한 말이다. 하지만 대상의 본질에 대한 이해는 작가에 따라 다르게 나타난다.
이 시기의 대표적인 작가인 겸재 정선은 중국의 화법인 남종문인화 기법을 바탕으로 우리 산하를 주체적으로 그려내었다. 성리학에 깊은 이해를 가졌던 겸재는 재구성과 변형, 즉 과감한 생략과 과장으로 학문적 이상과 우리 산하에 대한 감흥을 표현했다. 또한 겸재는 음과 양의 조화를 화폭에 담고자 했다.
<구룡폭포>에서 물줄기가 내 눈 앞에서 쏟아지는 듯한 감흥을 표현하기 위해 겸재는 앞, 위, 아래에서 본 것을 모두 한 그림에 담아냈다. 폭포수를 강조하기 위해 물줄기를 길고 곧게 내려 긋고 위에서 본 물웅덩이를 과장되게 둥글게 변형하였다. 그림을 보는 이들이 폭포수의 감흥에 집중할 수 있도록 실재하는 폭포 너머의 봉우리를 과감히 생략했다. 절벽은 서릿발 같은 필선을 통해 강한 양의 기운을 표현한 반면 절벽의 나무는 먹의 번짐을 바탕으로 한 묵법을 통해 음의 기운을 그려냈다.
진경산수화의 새로운 전기를 마련한 이는 단원 김홍도이다. 국가의 공식 행사를 사실대로 기록하는 화원이었던 단원은 계산된 구도로 전대에 비해 더욱 치밀하고 박진감 넘치는 화풍을 보였다. 그는 초상화에 인물을 사실적으로 묘사하여 인물의 정신까지 담아내려고 한 것처럼 대상의 완벽한 재현으로 자연에서 느낀 감흥에 충실하려고 하였다. 특히 중국을 거쳐 들어온 서양화법 중 원근법, 투시법 등을 수용해 보다 사실적인 경치를 그려내었다.
정조의 명을 받아 단원이 그린 <구룡연>은 금강산의 구룡폭포를 직접 찾아가 그 모습을 담은 것이다. 흘러내리는 물줄기, 폭포 너머로 보이는 봉우리, 폭포 앞의 구름 다리까지 사진을 찍은 듯이 생략 없이 그렸다. 과장과 꾸밈이 없이 보이는 그대로의 각도로 그린 것이다. 그리고 절벽 바위 하나하나의 질감을 나타내기 위해 선의 굵기와 농담에 변화를 주어 입체감 있게 표현하였다.
진경산수화는 우리나라의 산천이 곧 진경이라는 당시 사람들의 생각을 담고 있는 소중한 전통인 것이다. 우리 산하를 진경으로 표현함에는 우리 국토에 대한 애정, 우리 문화에 대한 자긍심이 담겨 있다. 이러한 진경산수화는 19세기 여러 작가들에게 영향을 미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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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날 나의 대학시절 기말고사 때 이런 깔끔한 글로 하얗게 빈 시험지를 가득 채울 수 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하고 생각해본다.
4학년 기말고사 때 '현대미술이란 무엇인가...'라는 글로 첫 문장을 시작했는데, 옆에 있던 친구가 그걸 보고 비아냥 거리던 모습이 생각난다.
'그런 식으로 첫 문장을 시작하는 걸 보니 너의 글의 전개가 얼마나 고리타분할지 안 봐도 알겠다'라고 나에게 이야기를 해주는 게 아닌가. 아... 난 내가 정말 멍청한 줄 알았다. 그렇게 세월이 20년도 더 지나 우연한 기회에 그 친구의 글을 읽어볼 일이 생겼다. 사회단체 및 여러 기관과 일을 해본 경험이 많고 각종 제안서를 작성하여 놀라운 결과를 만들어냈다고 하는 이 통찰력 있는 친구가, 자신이 작성한 엄청나게 긴 글이 있는데 이 글을 해당 기관과 적절하게 소통할 수 있는 형식으로 수정해 줄 수 있냐는 부탁을 받은 것이다. 퇴근 후 상당히 피곤한 상태였기 때문에 빠른 시간에 집중하여 살펴보았다. 더 볼 것도 없었다. 글의 논지를 항목별로 정리하여 빨간펜으로 고칠 부분, 빼야 할 부분을 체크해서 넘겨주었다.
이 날 잠들기 전 나는 생각했다.
'20년 전 이 사람은 나에게 무슨 자신감으로 그런 말을 했을까?'
성실해야 한다.
한 단계, 한 걸음을 무시하지 말고, 벼락치기도 하지 말고 조금씩 해나가야 한다.
쉽다고 무시하고 넘어갔던 어제의 그 문제는 아주 결정적인 순간에 발목을 낚아채어 나를 넘어뜨릴 것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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