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세 컨텐츠

본문 제목

공장 초기화된 핸드폰 데이터 절대 못 살린다 | 포기해라

말뚝이의 일기

by 이말뚝 2023. 5. 28. 02:11

본문

딸아이의 학년이 점점 올라가면서 핸드폰이 말썽이다.

부족한 데이터 용량과 보호자 폰에 연결된 '패밀리 링크'라는 앱 때문에 학습에 사용해야 할 앱 설치를 하는데 많은 방해가 되고 있다는 것을 인지하긴 했지만 그럭저럭 사용하면 될 거라 마음대로 생각하며 딸아이의 핸드폰을 바꿔 줄 생각을 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약정 기간이 아직 끝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몇 달만 더 참으면 된다 몇 달만.!!

하지만..

이런 나의 무식함으로 인해 얼마 뒤 큰 사건이 터지고 말았다.

꼬질꼬질한 핸드폰에 조금씩 투덜대면서도 곧잘 사용하길래 그런가 보다 했는데 어느 날 수업 시간 중에 자기만 핸드폰을 사용할 수 없어서 힘들다고 했다. 거기다 패밀리 링크 때문에 과제 수행에 상당한 문제가 생긴다고 해서 조금 심각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 우선, 패밀리 링크를 삭제하자.

딸아이 핸드폰을 개통하면서 패밀리 링크가 자동적으로 생성되었는데(이것도 나중에 알았다) 그걸 어떻게 삭제해야 할지 정말 아무 생각이 없었다. (이때 인터넷 검색을 조금이라도 해보았으면 별 일이 없었을 텐데....ㅜㅜ)

통신사 대리점으로 당장 달려가서 자존감 겁나 쎄 보이는 여직원에게 '해당 링크를 삭제하고 딸아이가 핸드폰을 마음대로 사용할 수 있도록 해주세요'라고 부탁했다. 기기를 다룰 줄 몰라 쩔쩔매는 아줌마를 위해 여직원은 기꺼이 이것저것 눌러보더니 '이제 삭제되었으니 핸드폰을 마음대로 사용할 수 있을 거예요'라고 하는 거다. 나는 연신 고맙다며 인사를 하고 집으로 왔다.

딸아이에게 이제 마음대로 핸드폰을 사용할 수 있다는 메시지를 넣었는데, 딸아이가...

"핸드폰을 초기화해도 돼요?"라는 메시지를 보내는 것이다. 

'뭐지??-_-'

난 무슨 소린지 몰라서 저녁에 집에 와서 같이 보자고 했다.

 

저녁이 되어 집에 돌아온 딸의 핸드폰을 들여다보니, '핸드폰을 초기화할까요'라는 메시지가 떠 있었다.

초기화 메시지 화면을 옆으로 밀어내고, 핸드폰에 담긴 자료를 백업하기 위해 다른 기기에 선을 연결하고 어쩌고 저쩌고 이것저것 버튼을 눌러보았다. 데이터 전송 중이라는 글자가 뜨고 달팽이가 계속 돌아가기만 하고 아무런 소식이 없었다.

'이거 고장 난 건가?...'

무식이 용감이라고, 나라는 이 미친 인간은 과감하게 뭔가를 눌렀다.

분명히 한글 메시지 창이었는데 무슨 말인지 알 수가 없었고 별일 없겠거니 하면서 눌러 버린 것이다.

그 순간.

핸드폰은 초기화되어 버렸다.

모든 것이 사라졌다.

딸아이가 공부하기 위해 수업 시간에 틈틈이 찍어놓은 자료 사진들, 공부하기 위해 모아둔 데이터들이 깡그리 날아간 것이다.

 

난 죽고 싶었다.

 

딸아이는 주저앉아 구석에 머리를 박고 소리 없이 몸을 떨고 있었다.

 

난 정말 무서웠다. 미칠 것 같았다.

저 아이가 어떻게 될까 봐.

 

내가 정말 무식해서 이런 일이 벌어졌을까? 아니다.

여러분도 그 상황에 있었으면 나와 같은 행동을 했을 것이다.

그때 딸아이의 핸드폰을 손댄 사람이 다 뒤집어쓰게 되는 그런 상황.... 그 운명적인 시점, 그 굴레에 내가 단단히 걸려버린 것이다.

그때 누군가 다른 사람이 손댔다면 그 사람이 나 대신 이 끔찍한 운명의 늪에 빠졌을 것이다.

애들 아빠 거나 딸아이의 친구가 그 사람이 될 수도 있다.

 

그날 밤 난 새벽 4시까지 잠을 이룰 수 없었다.

날이 밝을 때까지 핸드폰 데이터복구업체를 검색하고 여러 가지 사례들을 검색해 본 다음 기절하듯 잠이 들었다.

그러다가 잠이 벌떡 깨어 거실로 나가보았다. 우선 딸아이의 생사를 확인해야 했기 때문이다.

다행히 책상에 앉아있었다.

밤을 꼬박 새운 건지 눈이 충혈되어 있었고 미친 듯이 노트를 휘갈기며 과제를 하고 있었다.

과제를 끝내더니 침대에 누워 그대로 기절하듯 잠에 빠진 딸아이.

결국 이날 학교에 가지 못했다.

아... 내가 딸을 죽게 할 수 있다. 무섭다. 정말 무섭다.

 

늦은 아침을 겨우 챙겨 먹이고 아이와 함께 밖을 나섰다.

외출을 극도로 싫어하는, 햇빛을 쳐다보기만 해도 타 죽을 듯이 피곤해하는 극한의 히끼꼬모리가 드디어 문 밖을 나섰다. 무조건 나서야만 했다. 

 

첫 번째 방문지, 데이터복구업체

"핸드폰이 초기화되었다면 데이터는 포기하세요. 살릴 수 없습니다. 생명, 금융, 상속 문제라면 포렌식 기법을 이용해 살릴 수 있긴 하지만 100% 살릴 수도 없고 무엇보다 비용이 문제입니다. 기본 300만 원부터 시작한다고 보시면 돼요."

'뭐? 300만 원이라고? 이건 아니지...'

그렇게 가게 문을 나섰다.

 

두 번째 방문지, 통신사 대리점

약정이 남은 핸드폰을 해지하면서 남은 기계값 등 비용을 모조리 지불하고 최신 핸드폰을 구매하여 딸아이의 품에 안겼다. 관련 비용은 모두 나의 통장에서 빠져나갔다.

애들과 관련된 비용은 모두 남편 카드를 이용했으나 이번만큼은 내가 지불하기로 마음먹었다.

난 어떻게든 대가를 치러야 했다. 대가를 치르는 방법은 현재로서는 오직 그 방법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미안하다는 말과 슬픈 표정은 허접하다.

실체가 없고 모호하며 시간이 지나면 모두 사라져 버린다.

누군가에게 피해를 입혔다면 본인이 할 수 있는 가장 적절한, 가장 최소한의 사과는 금전적인 보상이다.

미안함을 표현하는 순수한 마음과 금전적인 보상이 함께 제공된다면 어지간한 사과와 용서가 상호 간에 이루어질 수 있다.

'돈이면 다 되냐?'라는 거지 같은 말은 하지 말자.

돈으로 대부분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는 사실은 누구나 알고 있지 않은가.

 

세 번째 방문지, 얼큰한 해장국집

딸아이가 좋아하는 감자탕을 사주었다. 큼직한 뼈다귀에 고기가 엄청 많이 붙어있어서 잘 먹더라...

 

네 번째 방문지, 피자집

집에서 먹을 피자를 포장해 가기로 했다.

 

내가 가진 금전으로 딸아이의 마음을 조금이라도 채울 수 있어서 정말 다행이었다.

알럽 자본주의

 

핸드폰에 저장된 것들을 다 날린다는 게 어떤 기분인지 너무나 잘 알고 있다.

예상치 못한 데이터 삭제는, 내 생명을 짧아지게 하고 나의 육신이 지옥 불구덩이에 떨어진 것 같은, 온몸의 살점이 뜯어져 불에 태워지는 것 같은 끔찍한 고통을 느끼게 한다.

그리고 미쳐버린다. 심하면 정신과 진료를 받아야 할 수도 있다.

딸아이가 그런 상태가 될까 봐 너무 무서웠던 것이다.

 

시간이 지나면 딸아이의 마음에서 이번 사건의 충격은 희미해질 것이다. 지워진 데이터들도 사실 따지고 보면 별 것 아니다. 다시 시작하면 되니까. 사라진 건 데이터지 육신이 아니니까. 건강한 육신이 있으면 다시 시작할 수 있다.

 

이 사건은 나에게도 큰 충격이어서 한동안 블로그에 글을 쓸 수 없었다.

속이 시커멓게 타들어가고... 상처에서 피가 흐르는 모습을 냉정하게 들여다볼 수 없었다.

그냥 입을 다물고 오직 작업에 더 전념하였다.

작업은 진공의 시간을 나에게 무한대로 제공하니까.

아무것도 귀에 들리지 않았고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마음속으로 계속 울었다.

 

이제는 조금 마음의 기력을 차렸다.

작업이라도 하지 않았으면 난 어떻게 되었을까..

분명히 병원을 찾아갔겠지...

 

이제 그만할래.

난 대가를 치렀다.

관련글 더보기

댓글 영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