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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방암 진단 1년 후...

유방암 치료

by 이말뚝 2022. 12. 3. 16: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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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왕리 해변가

오른쪽 가슴에 암덩어리가 생긴 후 1년이 지났다.
항암치료, 수술, 방사선과 같은 암 치료의 수순을 밟느라 1년이 어떻게 지나갔는지 모르겠다.
치료 단계는 기억나는데,
각각의 치료 단계를 넘어갈 때마다 참고 견뎌야 했던 육체의 고통이 어떻게 지나갔는지 기억나지 않고
... 또 기억하고 싶지도 않다.

1년이 지난 지금의 시점에서 좋은 점만 이야기해보자면,

1) 거지같은 기억만 남은 직장을 정당하게 휴직하고 나만의 시간을 가질 수 있었다.
2) 내가 하고 싶은 일에 더 집중할 수 있었다.
3) 할 수 있는 일과 할 수 없는 일을 구분하게 되었다.
4) 항암치료가 끝난 후 계단 내려가기가 매우 수월해졌다.
: 이제는 한 발에 한 계단씩 성큼성큼 내려갈 수 있다. 종아리 근육 당김 현상과 엄지발가락 관절 통증이 이제는 거의 느껴지지 않을 정도이다~^^
5) 두통의 발생 횟수가 현저히 줄어들었다.
: 두통의 강도는 여전하지만 횟수가 줄어든게 너무너무 감사할 따름.
6) 손발 저림 현상이 회복되고 있다.
: 70대에서 50대 폐경기 여성의 상태로 회복된 느낌.^^ (현재 40대)
7) 빨대 꽂는 인연들 싹 정리.
: 남에게 빨대를 꽂힐 만큼 내가 가진 게 많은 사람은 아니고... 그저 빨대 꽂기 좋은 인간이었다. 나 자신을 제대로 지키지 않고 방치한 끔찍한 결과라고 생각함.
8) 소소하게 나를 편안하게 해주는 인연을 만남.
: 인연이라는게 억지로 연결되는 것이 아니었다. 자연스럽게.. 생각날 때마다.. 어쩌다 한 번 연락하면 좋은 사람들^^
9) 시댁 식구들이 더 이상 날을 세우지 않는다.
: '암' 치료 중이라는데 더 말할 필요가 없다. 암환자 건드리면 그건 인간도 아니지.
10) 오직 나를 위한 치료에 전념함.
: 나를 위해 병원비를 이렇게 써 본 적도 없고, 몸을 보하기 위해 적당한 치료법을 열심히 알아본 적도 생전 처음이다. 인생사에 지친 내 몸뚱이를 열심히 보듬어주고 있다.

지난 1년은 내 인생에서 그냥~ 통으로 사라져버린 시기이다.
백지 같은 시간이라고 할까...
방송채널 수신 불가 화면처럼 '칙~~~' 하는 기분 나쁜 소리를 내던 지난 1년의 시간이었다.
좋은 점을 찾아보니 무려 10가지가 나와서 정말 의외라는..-_-

생각 같아서는 직장에 사표를 던져버리고 과감하게 나아가고 싶지만,
겁대가리 없이 과감하게만 살아서는 안되는게 인생이더라.
더럽고 치사하지만 얼음이 깨질세라 한 발 한 발 조심스럽게 발을 내디뎌야 하는 싸늘한 겨울이 내게 닥친 것이다.
살살 조심조심 방어적으로 살아가야 한다.
아직은 죽을 수 없지 않은가. 내게는 하고 싶은 일이 남아있으니까.

내가 존재하는 인생이 몇 가지 종류가 있다고 생각한다.(이걸 멀티버스라고 하는 게 맞는감??)

그중 제1 인생은...
옛날, 부친의 사업이 망하지 않고 여전히 잘 사는 집의 딸로서 예술대학, 대학원을 멋지게 졸업하고 유학을 갔다 와서 아티스트의 삶을 사는 세계관이다.
그런 인생을 살았다면 아마... 지금 나이쯤 나는 자x했을 거라는 생각이 든다.
난 아티스트로서 정말 열심히 살아갔을 것이다. 하지만 내 자신 속으로 너무 깊숙이 침투해 들어간 나머지, 햇빛 비치는 현실 세계로 다시 돌아올 체력을 모두 소진했을 것이다. 자x이라는 건 너무나 당연한 결과이다.

제2 인생은...
대학만 딱 졸업하고 바로 직장생활을 시작하는 것이다.
어떻게든 내 힘으로 살아야 하기 때문이다. 아티스트가 되고 싶었던 마음을 누르고, 내 능력이 부족했기 때문에 예술가가 될 수 없었다는 최면을 스스로에게 걸고 불만스러운 생활을 꾹꾹 눌러 참아가며 평범하게 살아가다가 지금 나이에 암걸림.

제3 인생은...
고3 때 제대로 된 입시지도를 받았다면,
내가 원했던 대학에 진학해서 예술의 화신으로 불타는 4년을 보내고 예술 뽕에 빠진 채 홍대 거리 구석진 원룸에서 유튜버로서 살기.(서울 이외의 지역은 사람이 살 수 없는 황폐한 오지로 생각함) 꿈을 포기하고 평범하게 살아가는 동기에게 예술가의 삶에 대해 이야기하고, 애한테 시달리고 신랑과 싸움만 하는 아줌마들의 인생이 정말 하찮다고 생각하지만 그들이 누리는 번지르르한 아파트 생활에 살짝 빈정상하기도 하는 인생. 지금 나이에도 늘 젊고 힙한 마음으로 살아가지만 그래도 고민이 많음.
(유튜브 채널 '오마르의 삶', '김알파카 썩은 인생' 참조)

이 3가지 인생은 모두 지금 내 나이에 오지게 현타가 와서 각각 다른 결과를 맺었을 것이다.
지금은, 제1 인생의 죽음으로 마무리되는 결과가 아닌, 암 투병생활을 맞이하는 제2 인생을 살고 있다.
(아... 제3 인생은 생각하고 싶지도 않다.-_-)

암 진단 1년 후...
지금은 대나무의 굵직한 마디를 지나가는 힘겨운 시간이다.
암진단 전에 손금을 본 적이 있는데, 돌팔이같이 생긴 그 대머리 점쟁이는 나보고 오래오래 살 거라고 하더라.
쌩 거짓말이다.
분명 손금을 볼 시점에 나의 생명력이 많이 희미해져 있었을 텐데 나에게 용기를 주느라 그랬던 걸까.
아마도 죽음이라는 단어를 입 밖에 내기가 무서웠던 거겠지.

요즘은 '새덕후'라는 유튜브 채널을 보고 있다.
내레이션 없이 그저 숲 속에 작은 물그릇 하나 갖다 놓고 새들이 물을 먹는 장면을 길게 촬영한 영상이다.
멍 때리며 그 영상을 바라보는데 어느새...
이 연약하고 작은 생명체가 나의 지친 마음을 부드럽게 어루만져주고 있었다..ㅜㅜ
새는 인간의 영혼을 저승으로 데려다준다고 했던가... 어디서 들은 것 같은데 맞는지는 모르겠다.
새가 하는 일이 뭔지는 모르겠지만...

나는 새가 되고 싶다.

작고 가벼운 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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