또다시 잔뜩 취해서 들어온 남편.
회식인지 뭔지 모르겠지만 그 또래의 아재들끼리 모여서 이것저것 다 퍼마시고 온 눈치다. 정신을 차리지 못한다.
현관을 들어서는 그의 모습, 걸음걸이, 탁 풀려버린 눈빛을 보면 어느 정도 짐작할 수 있다.
그리고 냄새.
담배, 땀, 음식, 술, 음식점의 탁한 공기 냄새가 한꺼번에 섞인 그의 숨결은 어느새 안방을 가득 채우고 있어서 선뜻 들어가기가 무서울 지경이다.
술에 취한 이 남자... 온 세상이 아름답고 모두가 내 것 같은 망상에 사로잡혀서 꿈길을 걷는 표정이다.
지금 옆에 앉아있는 이 여자가 아내인지 아닌지는 잘 모르겠지만, 왠지 아내일 것 같다는 어설픈 확신을 가지고 이 여자와 함께 즐거운 시간을 갖고자 열심히 몸을 놀린다.
연이은 항암치료와 수술 등으로 인해 1년을 넘게 잠자리를 하지 못해서 그간 남편에게 미안한 마음이 있었던 터라 그의 손길을 거부하지는 않았다. 아내로서의 의리를 위해 냄새나는 저 남자의 숨결은 좀 참기로 했다. (정말이지... 상당한 용기가 필요했다)
밖에서 일하느라 힘든 남편을 위해 그리고 원만한 부부생활을 위해 나도 어느 정도 희생은 해야 하지 않겠는가. 항암을 핑계로 남편의 손길을 거부하면서 내 육신의 건강과 안락함만을 생각하는 건, 어느정도 회복한 지금 상태에서는 너무 이기적인 모습인 것 같았다.
그래. 좋았다.
남편은 술이 너무 과했는지 우리의 아름다운 시간은 오래 지속되지는 않았지만 서로의 사랑을 확인하기에는 충분한 시간이었다.
그.
런.
데.
남편 새끼의 입에서 갑자기 이런 말이 튀어나온 것이다.
그 뒤에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자세히 적지는 않겠다.
액션 영화에서 보았던 발차기와 목조르기를 내가 그렇게 잘하는지 예전엔 미처 몰랐었다. 이때만큼은 링 위에서 으르렁거리는 한 마리의 사자였다.
이 남자한테 할 수 있는 온갖 더러운 욕이란 욕은 다 쏟아부었다.
다행인 건지 술이 많이 취한 이 인간은 내가 자신에게 무슨 일을 행하고 있는지 전혀 감각이 없어 보였다.
그래, 차라리 못 느끼는 게 서로를 위해 좋겠지.
술김이라도 언어감각은 살아있었던 건지, 자기가 왜 욕을 먹어야 하는지 매우 불쾌하다고 한다.
(차라리... 잠이나 곱게 자라...)
다음날은 딸아이의 졸업식이었다.
그날 휴가를 내서 졸업식에 참석한 저 인간과 나는 남남처럼 못 본체 하고 있었고 사진 찍을 때에 겨우 옆에 다가섰다.
저녁까지 서로 아무 말하지 않았다.
알지 못할 싸한 공기가 집안을 감쌌고, 아이들과 친정엄마는 뭔가 이상하다고 느꼈는지 모두 아무 말을 하지 않는 아주 적막한 저녁시간이었다.
그래, 집에서 저 인간과 싸울 수는 없겠다.
지하주차장으로 내려간 다음, 차에서 2차전을 열었다.
참으로 골 때리는 건, 이 남자는 지난밤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정말! 하나도 기억이 나지 않는다는 거다.
자기가 무슨 말을 했는지 모르겠다는 저 태도는, 자기는 결백하다는 뜻을 드러내 보이고 싶은 처절한 몸짓이겠지.
기억나지 않기 때문에 자기는 잘못한 게 없다는 저 뻔뻔하고 천진난만한 얼굴.
아무 뜻 없는 무의미한 행동에 왜 화를 내는 건지 도저히 이해를 할 수 없다는 거지... 이건 완전, 내가 미친 여자인 거다.
경멸스러운 눈빛으로 나를 쳐다보는 저 남자.
스트레스를 많이 받았던 건가 나는 감기몸살을 가볍게 앓았고,
다음날 병원에 갔더니 호중구 수치가 너무 떨어져서 다음 주로 진료가 또다시 연기되었다.
호중구가 떨어져서 진료가 연기되었다고 이 남자에게 문자를 넣었더니, 엄청 안타까워하는 메시지를 나에게 보낸다.
어이가 없다.
그다음 답장으로 보낸 나의 문자메시지를 그대로 옮겨본다.
뭘 새삼스럽게 슬퍼하시나요.. 한두 번도 아니고 이제 덤덤해져야지요. "나 이제 집에 가야 하는 거지?"와 같은 명문장도 몇 번 더 들으면 경험치가 쌓여서 별 자극이 없을 것 같아요. 그래도 이번엔 가벼운 감기몸살 정도로 지나가서 다행입니다. 지난번 와인빛 립스틱 마스크 때는 한 일주일 아팠었네요^^ 자기나 나나 뭐... 부족한 사람들끼리 만나서 부부가 되었으니 잘 살아봅시다. 누가 먼저 가든 그 사이에 서로 의리는 지키는 걸로. 오케이?
당연히 답장은 없다.
자기는 잘못한 게 없으니까.
난 결심했다.
다른 사람들처럼 사우나에 가서 멍 때리며 시간도 보내고, 골프도 치기로.
저 인간이 누리는 즐겁고 평안한 시간을 나는 이때까지 외면하고 있었다. 얼마든지 저 인간을 따라다니며 골프 치러 놀러 다닐 수 있었지만, 그건 내 능력으로 이루어지는 아니었기에 나는 모두 거부했었다.
남편이 일구어 놓은 세계를 아내라는 명분만으로 쉽게 누리는 건 보기 좋지 않다고 생각했다.
시골에서 고생하시는 시엄니를 봐서라도 그렇게 팔자 좋은 여편네 모습으로 살아갈 수는 없었다.
하지만, 이제 생각이 달라졌다.
집에만 틀어박혀 책만 보고 있는 내가 바보였다.
사우나를 마치고 선홍빛 얼굴로 기분 좋게 귀가하는 남편 새끼를 그냥 두고 볼 수만은 없구나.
방사선치료로 피부가 벗겨지고, 젤로다 먹느라 손발이 시커멓게 변한 나만 바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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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들어 블로그의 조회수가 높아지고 있는데, 여기에는 남편의 공이 큰 것 같습니다.
나중에 좋은 일이 생기면 남편에게 먼저 감사의 인사를 드려야만 할 것 같네요.
그리고 여러분, 부족한 저의 글들을 읽어주셔서 너무너무 감사합니다~*^^*
오늘도 즐겁고 행복한 하루 보내세요~~ 알라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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