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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피쟁이의 애티튜드

말뚝이의 일기

by 이말뚝 2023. 3. 6. 22: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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혈당 조절을 위해 아메리카노만 마시던 나.

암 치료로 일 년을 쌔게 고생하다 보니 입맛이 예민해졌는지 블렌딩 된 싸구려 아메리카노는 점점 느끼해졌고, 다 마시고 난 뒤에 토할 것 같은 찝찝한 기분을 느끼게 되었다.

취미 생활이 일절 없는 나의 유일한 즐거움, 커피를 포기할 수는 없었다.

어느 날 단골 커피점 메뉴판에서 '스페셜티 커피'라는 단어를 보게 되었다. 뭔지 모르겠지만 아무튼.. 스페셜하다니까 이걸 마시면 기분이 조금 업~ 될까 싶어서 마셔보았다. 

결과는 대만족.

매주마다 원두를 바꾼다는 데 이름이 복잡해서 내가 뭘 마시는지 그다지 기억하고 싶지는 않다. 주인장님께서 내려주시는 대로 먹어보기로 했다.

스페셜티 커피는 끝맛이 매우 깔끔하고 미묘한 여운을 준다. 초코맛이 날 때도 있고, 달고나 맛이 날 때도 있고, 어떨 때는 녹차의 쌉쌀한 맛이 나면서 혀 끝을 탁- 치고 목구멍으로 쑥~ 넘어가는 끝맛이 너무너무 매력적이다.

요 끝맛 때문에 매일 스페셜티를 마시기도 하지만 무엇보다 두통에 직빵이라 그럴 수밖에 없다.

나의 고질병, 두통의 전조가 뒷목에서부터 올라온다 싶으면 가게로 달려가 스페셜티 커피를 마셔주면 어느새 싹~~~ 가라앉아버린다. 완전 땡큐지~~~ㅠㅠ

토요일 아침 늘 그랬던 것처럼 커피집에 들러 스페셜티를 주문했다. 주말 아침에는 주인장의 싸모가 나와서 매장을 보신다.

싸모라는 것을 어떻게 알았냐고?

손님의 눈을 뚫어져라 쳐다보며 주문을 받는 자본주의에 듬뿍 빠진 듯한 이글아이가 나의 두개골을 관통하는 기분을 느꼈기 때문이다. 아르바이트생의 멍한 눈빛과는 차원이 다르다. '그 어떤 주문도 놓치지 않고 다 받아주리라. 한 컵 한 컵 열심히 팔아서 가게 월세, 애들 어린이집 비용 내고 이번달 수영 학원도 추가 등록해야지...'라는 생활밀착형 여인의 끈적이는 열정이 나의 온몸을 휘감는 듯했다.

나이는 나보다 조금 적은 듯했고, 남편의 커피열정에 못 이겨 가게를 여는데 찬성을 했으며, 생각보다 빠듯한 살림에 조금 질린 듯한 30대 중후반의 다소 얼굴 피부가 처져 보이는 여인이었다.

깐깐한 남편으로부터 가게 운영법을 많이 전수받아서 이제 웬만한 커피 내리는 것쯤은 어렵지 않은 세미 프로의 수준이랄까? 하지만 커피라는 음료를 그다지 좋아하는 것 같지는 않았다.

저 여인이 내린 커피의 맛은 별로일 것 같았지만 그래도 주문해 보기로 했다.

3분이 지나도록 커피를 계속 만지작 거리고 있길래 그런가 보다 하고 기다렸다. 싸모가 뒤를 돌아 나를 보더니 "지금, 스페셜티 원두가 3g 부족한데, 제가 500원 빼드릴 테니 다른 음료를 드시는 건 어떤가요?"

음... 난 생각했다.

'아메리카노, 싫어. 과일 음료, 싫어. 바닐라 라테, 싫어........'

"용량이 모자라도 괜찮으니 커피 내려주세요"라고 오더를 내렸다.

난 기대했다. 원두 용량이 적으면 물의 양도 조절해서 좋은 맛을 낼 수 있게끔 최대한 애를 써주겠지~^^ 하고 말이다.

이 매장에서 스페셜티 커피를 주문하는 고객이 별로 없고, 주인장은 물론 아르바이트생들이 나의 얼굴을 알고 있을 정도로 자주 들락거려서 이제는 내가 매장 문만 열어도 알아서 준비해 주는 정도가 되었지만, 이 싸모라는 여자는 눈썰미가 모자란 것인지... 웬 아줌마가 비싼 커피를 마시네? 하는 모양새다. 아무튼 거기까지는 좋다.

원두 용량이 모자라는, 물이 흥건한 스페셜티 커피를 카운터에 달랑 올려놓고 가져가라고 한다.

아.... 정말.... 뭐라고 지랄하고 싶었지만 참았다.

난 교양 있는 단골이니까.

집에 와서 한 입 마셔보고..... 앞으로 이 매장에는 발길을 끊어야겠다고 결심했다.

남편에게 이 이야기를 했더니

"당신이 별난 거야! 그래서 또 손절 칠 거야?!!"

라며 나를 몰아붙인다.

그래. 당신이란 남자에게 물어본 내가 도른년이지.

 

다음날, 커피를 마시지 않고 버텨보다가 오후쯤 되자 뒷목에서 두통이 서서히 올라오기 시작했다.

너무 무서웠다.

두통이 올라오는 상태에서는 산책도, 헬스장도 도움이 되지 않는다. 진통제도 이제는 그만 먹고 싶고, 게다가 오늘은 일요일이라 한의원에서 침을 맞을 수도 없다.

어쩔 수 없지. 난 커피매장으로 얼른 달려갔다.

싸모는 없었고, 예쁜 알바 언니가 있어서 푸념을 늘어놓았다.

"... 어제 커피 너무~~!!! 실망했어요. 오늘은 스페셜티 원두 있나요??"

알바 언니는 어제 상황을 기억하는 것인지 약간 움찔하더니 말없이 커피를 내리기 시작했다. 마침 매장에는 아무도 없어서 의자에 앉아 커피를 홀짝이기 시작했다. 두 손으로 관자놀이를 주무르고 두 눈을 감싸고 한참 동안 앉아있었다. 아......... 두통이 서서히 가라앉기 시작했다.

주인장님께서 이제 출근을 한 것인지 나에게 아는 척을 한다. 평소엔 이 주인장님과 대화를 한 번도 하지 않지만 이날만큼은 내가 신이 들린 건지 살짝 분노한 목소리로 썰을 풀기 시작했다.

어제 용량 모자란 커피를 주문한 것은 내 잘못이지만, 먹어보니 정말 맛이 없었고 기분이 너무너무 상해서 오늘 또다시 방문해서 커피를 마시는 중이다...라는 내용이었다.

주인장님은 내 이야기를 가만히 듣더니 적잖이 놀라는 눈치다.

아무튼간에 나는 깔끔하게 커피를 원샷 때리고 매장을 나섰다. 아~~~ 정말 살 것 같았다.*^^*

 

그렇게 하루가 지나고.... 다음날 아침 또 스페셜티를 주문하러 갔다. 근데 주인장님이 커피값을 받지 않는 거다. 뭐지??

어제 싸모와 이야기를 해봤는데 그날 사정을 자세히 들어 알게 되었고, 우선 고객님께 너무 죄송하다. 판매되지 말았어야 할 커피가 판매된 거다. 오늘은 무료로 커피를 내려드릴게요..라는 이야기였다. 

여윽시, 주인장은 주인장이다.

 

난 커피에 대해 생무식한 인간이지만, 커피라는 음료가 정확한 레시피를 기준으로 만들어져야 하고 더군다나 커피의 맛을 좌우하는 원두는 여러 가지 환경적인 요인에 매우 민감한 소재라는 것쯤은 알고 있다. 이 싸모라는 여자는 그런 기본 상식을 완전히 어긴 것이다. 이 여자는 기본 상식을 몰라서 어긴 것이 아니다. 내가 정말 괘씸했던 것이 바로 그 점이다.

용량이 모자라는 커피를 판매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머리로는 알고 있었지만, 이번달 애들 학원비 생각에 이 커피를 팔고 보자는 심보가 너무나 지저분하게 느껴졌기 때문이다. '고객님 당신이 이 커피를 그냥 달라고 했으니까 판매자로서 나는 도의적인 책임은 없다'라는 뻔뻔한 태도는 커피쟁이로서는 완전 아웃이다.

난...

커피의 용량이 모자라다면 모자란 대로 최대한 맛을 뽑아내기 위해 노력을 기울이는 자세를 보고 싶었다.

그리고

용량이 모자라 맛은 없지만 이 커피를 팔아야 한다는 절실함이 있다면, 나에게 물이 흥건한 커피와 함께 100원짜리 사탕이라도 손에 쥐어주며 '고객님, 오늘은 사정이 있어서 커피맛이 조금 덜할 수 있으니 조금만 양해해 주세요. 하지만 다음에 방문해 주시면 더 맛있게 내려드릴게요'라고 말할 수 있는 센스를 원했던 것이다.

맛없는 커피를 내려줘서 고객에게 미안한 마음을 조금이라도 표현하는 말 한마디가 듣고 싶었던 것이다.

 

싸모의 행동은 싸구려였다.

바로 이런 것을 '역량이 모자란다'고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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