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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년은 무엇으로 완성되는가

말뚝이의 일기

by 이말뚝 2023. 3. 15. 13: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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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상의 수확물 : 치약

꾸준히 약을 복용해야 하는 암환자는 언제나 머릿속이 흐리고 몽롱하다.

한때 똑똑하다고 잘난 척했던 인간도 아프면 어쩔 수 없이 무너지기 마련이다.

난 똑똑하지도 않고 원래 과대망상 환자인 데다가 약까지 먹고 있으니... 몸도 약해지고 마음도 약해지고 정서적인 힘도 약해져서 판단이 매우 흐려지고 이상한 말도 잘 지껄인다. 나이를 더 먹어가면서 중년을 향해 끝없이 달려가고 있는데... 오늘! 드디어! 내가 중년의 나이에 들어섰다는 이정표 같은 일이 생겼다.

오늘 아침, 두 달 전에 만든 적금 통장을 뒤적이고 있었다. 계약 사항에 적힌 금액보다 더 많은 금액이 빠져나가는 게 아닌가?!!!!

"오! 이런!! 다 뒤졌어!..."

농협 직원 횡령 사건이 엊그제 뉴스에 나왔던 걸 기억해 내고는 나도 드디어 뉴스의 주인공이 되는 건가 하며 묘한 흥분에 사로잡힌다.(아까 말씀드리지 않았는가. 난 과대망상증이 있다고...ㅠㅠ) 벌떡 일어나 은행으로 달려간다. 그때 나에게 계좌를 만들어줬던 직원을 참교육할 때가 왔구나 하면서, 날듯이 걸어갔다. 

내 차례가 되어 직원과 마주 앉아서 진상질을 시작했다.

'너네 이거 사기 치는 거냐, 출금 금액과 적금 입금 금액이 왜 다르게 설정되어 있느냐, 내가 본점 고객센터에 바로 전화하려다가 여기로 온 것을 다행으로 여겨라, 출금입금의 차액을 너희들이 먹으려고 한 거냐, 너네 은행에 오만정이 다 떨어졌으니 적금 계좌 해지하고, 그때 너네가 권했던 다른 금융상품도 해지하겠다..... 블라블라블라....'

계속 미친 소리를 지껄였다.

커다란 겨울 패딩을 입고 안경을 머리에 걸친 이상한 중년아줌마의 외침에 당황한 직원 주위로 다른 직원들이 몰려들기 시작했다. 나는 당당했다. 그래!! 너네가 뭘 잘못했는지 잘 살펴보라고~!!!!!!

자기네들끼리 웅성웅성하더니, 한 직원이 내 옆으로 다가와 천천히 하나씩 설명해 주었다................-_-...........

 

결론,

적금 계약 시, 직원이 내게 설명을 해줬던 내용인데 내가 까맣게 잊어버리고 온갖 지랄을 떤 것이다.

 

'아............ 내가 잘못한 거네...ㅜㅜㅜㅜㅜㅜㅜㅜㅜㅜㅜ'

 

그때의 뻘쭘함을 어떻게 표현할까...

이전과는 뭔가... 달랐다.

2년 전의 나였다면 쥐구멍에라도 들어가고 싶을 정도로 귀와 목까지 빨개졌을 텐데 이상하게.... 그런 감정이 전혀 들지 않는 것이다. 나의 부끄러움이 큰 데미지로 다가오는 게 아니라는 거지. 정말 신기했다.

창구 직원 언니가 어금니를 꽉 깨물며,

"고객님, 정말 죄송합니다. 이거 저희 사은품인데 받아주세요." 하고 가짜 미소를 지으면서 나에게 치약을 건넨다.

내가 뭐라고 했겠는가?

"나 이런 거 받으러 온 사람 아니에요!"라고 또 큰소리를 쳤다. 옆에 있던 다른 직원이 내 나일론 장바구니에 치약을 슬쩍 넣어주며 "그냥 가져가세요~ 고객님~'"하며 살갑게 대해준다.

난 또 뭐라고 했겠는가?

"에이~~ 나 없어 보이게 이런 거 받아가는 사람 아니라니까!"라고 하면서,

장바구니를 불끈 잡고 은행문의 자동열림 버튼을 누르기 위해 출구 쪽으로 걸어가고 있었다.

 

은행을 나와 집으로 걸어가면서... 장바구니에서 치약을 꺼내어 살펴보았다.

'진짜 치약이 맞는 거야? 마침 집에 치약 없었는데 잘 됐다...'

왠지 모를 안도감과 만족감이 나를 감싸네....

길 가에 우두커니 서서 장바구니를 뒤적거리는 나.

 

이거야 말로 중년의 완성 아닌가.

또 하나의 깨달음이 왔다.

진상을 쳐도 별로 자극이 없고 '잠깐 겪은 일인데 뭐 어때?' 하며 바로 잊어버리는 중년 아줌마.

어릴 때 그렇게 혐오했던 아줌마들의 뻔뻔스러움이 갑자기 나의 영혼을 잠식해 버린 것이다.

 

이상하게 마음이 편하다.

요동치는 계곡물을 따라 이리저리 흔들리다가, 하천의 쓰레기가 둥둥 떠다니는 널따란 바닷물에 갑자기 당도하여 천천히 헤엄치는 느낌이랄까...

될 대로 돼라.. 그런 마음도 생기고,

이렇게 또 시간은 흘러가겠지.. 뭐... 이런 생각도 든다.

어설픈 나의 인생이 이렇게 정점을 맞이하는구나.

바보 같으면 바보 같은 대로, 아프면 아픈 대로, 그렇게...

우주먼지 하나가 구차한 목숨을 부지하고 있는 것이다.

 

저 때문에 잠시 스트레스를 받았을 은행 직원 여러분들께 정말 사죄드립니다.

하지만, 직접 가서 말하지는 않을 거예요.

너무 구질구질하고 없어 보이니까요.....ㅠㅠ

죄송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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