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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화, 겨울의 시다바리

말뚝이의 일기

by 이말뚝 2023. 3. 12. 1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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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덧 3월 중순.

산책로 길 가 양 옆으로 심어진 다른 나무들은 여전히 눅눅한 겨울 껍질에 싸인채 꼼짝할 생각을 않는다. 이른 봄의 칙칙한 풍경을 화사하게 만드는 존재, 매화나무가 이럴 때는 완전히 독보적이다.

매화에 얽힌 이야기들이 엄청나게 많을 것이다. 네이버를 슬쩍 들쳐보기만 해도 매화 관련한 이야기와 사진이미지들은 끝이 없다.

매화는 기나긴, 지겨운 겨울을 지나왔다는 이정표가 될 수 있으니 봄에 대한 기대감으로 많은 사람들의 가슴을 설레게 하는, 쩍쩍 갈라진 논바닥 같은 메마른 가슴에도 문학적 감성의 빗줄기를 내려주는 고마운 존재이다.

미술이 전공인 관계로(동양화에 관심이 많기도 했지만) 어린 시절부터 많은 그림을 찾아보았는데 그중 매화를 표현한 그림들이 인상에 많이 남는다. 일반인에게도 그렇지만 많은 예술가들에게 매화는 묘한 흥분을 불러일으키는 소재인가 보다.

매화꽃은 대부분 하얀색으로 표현된다. 백묘법으로 매화를 간단히 표현하기도 하고, 어둡게 염색된 종이에 흰색 석채를 이용해 꽃을 표현하기도 한다. 먹을 듬뿍 묻힌 붓으로 매화나무줄기를 못생기게 찌글찌글 그린 다음, 점을 찍듯 귀여운 동그라미를 그리듯 별 고민 없이 슥슥 그려내면서 활짝 핀 꽃들이 한쪽에 몰린 부분과 가지 끝에 점점이 피어있는 꽃 봉오리들을 몇 개 표현해 주면 훌륭한 그림이 완성된다.

매화가 상징하는 봄이라는 주제에 너무 몰입해서 그 표현이 매우 과하다고 느껴지는 작품들도 몇 있는데, 마녀의 숲에 있을 법한.. 무시무시하고 압도적인 늙은 매화나무에, 별이 쏟아질 것 같은 너무나 화려하기 그지없어서 너무나 비현실적인.. 은하수 같은... 매화꽃을 잔뜩 뿌려놓은 작품도 발견할 수 있다.

어린 시절에 보았던 작품이기 때문에 그로테스크하고 강렬한 인상을 주는 매화 작품들이 기억에 그대로 남아있는데, 난 매화나무가 그렇게 크고 무섭게 생긴 것인 줄로만 알았다. (나는 아스팔트 태생으로 글로 연애를 배웠던 본 투비 찐따니까 가능한 이야기다.)

 

오늘 아침, 두통에 시달리는 늙은 중년 여자는 비틀비틀 산책길을 나섰다가 매화나무를 발견했다.

요즘은 산책로 조경이 잘 되어 있어서 계절마다 번갈아 꽃이 피는 나무들을 다양하게 심어놓아서 구경하는 재미가 쏠쏠하다. 내가 조금만 더 부지런한 인간이었다면 다른 언니들처럼 핸드폰을 들고 열심히 사진을 찍으며 돌아다녔을 것이다. 커피를 마시지 못해서 그런가... 이틀 내내 은근한 두통과 무기력한 몸살 기운에 흠뻑 젖어 있어서 도저히 기분이 좋을 수가 없었다.

그렇다. 난 꼬여있었다.

하얀 꽃봉오리를 피워내는 귀여운 매화나무를 보니 '과연 저것이 봄의 전령인가'라는 의심이 들기 시작했다.

이게 전령이라고?

입시시절 석고 데생을 하면서 내가 정말 좋아했던 석고상인 헤르메스 정도는 되어야 '전령'이라고 부를 수 있는 거 아니야????

헤르메스 대리석 상(석고상의 원본)

미술이라는 세계에 조금이라도 발을 담갔던 인간이라면 이게 문제다. 시각적으로 멋지고 아름다운 것이 아니면 성에 차지 않고 그게 심해지면 분노를 터뜨리기까지 하는 미친 습성 말이다.

미의 기준은 여러 개 있다지만... 여러분들도 한 번 생각해 봐라. 멋진 게 멋진 거 아님?

 

커다란 병풍을 가득 채우던 매화나무의 멋진 모습은 완전 가짜였다. 예술가의 해석일 뿐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는 거지. 오늘에야 드디어 매트릭스를 찢고 나온 느낌이랄까.

매화나무는, 여름이 가까울수록 아름답고 푸르른 이파리를 피워내는 MBTI에서 극 'E' 성향의 길쭉길쭉한 나무들 사이에서는 그 존재감을 찾을 수 없는 완전 찐따의 모양새였다.

우선 키가 너무 작아서 길가에 심어 놓을 수밖에 없고 나무 자체의 모양이 그냥! 못생겼다; 명승고적에 당당히 자리 잡은 매화나무는 오히려 특이한 존재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일부러 시간을 내어 먼 거리를 달려가서 보고 오는 것 아닌가.

찌질하게 자라난 메인줄기에서 새파란 줄기를 하늘로 뻗어내며 자그마한 꽃봉오리를 피워내는데 이건 봄의 도래를 알리는 힘찬 팡파르 소리가 아니라, 지나간 겨울에 대한 아련한 기억을 떠올리게 하는 자그마한 리코더 소리 같다고 해야 할까?

 

"너희들 겨울 기억하지? 겨울에 내렸던 예쁜 눈꽃송이의 모습을 내가 마지막으로 보여줄게. 이제 날씨가 더 따뜻해지면 볼 수 없을 거야. 지금이 아니면 내가 여기 있다는 사실을 아무도 모를 것 같아서 좀 일찍 나온 것도 있어~ㅠㅠ..."

 

겨울의 끝자락을 부여잡고 본인이 언제 나타나야 할지 낄끼 빠빠를 잘 알고 있는 녀석이다.

늙은 여자의 얼굴에서 떨어진 듯 한 하얀 분가루를 바닥에 소복이 깔아놓은 매화나무야. 또 보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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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주일이 훌쩍 지난 지금 시점에서 매화에 대해 또 할 말이 생겼다.

매화는 늙은 여자의 얼굴 같다는 생각은 변함이 없다.

그러나...

꽃봉오리를 하나씩 힘겹게 피워내는 이 불쌍한 생명체를 자세히 들여다보니...

가슴속 깊이 넣어 둔, 넣어둔 건지 미처 인식하지 못했던..

늙은 여자의 예쁜 꿈같다.

작고 작은 꽃을 피워내고 얼마 있다가 그 예쁜 꽃잎은 스르르 땅바닥으로 떨어져 사라진다.

꽃이 있었는지 없었는지 건강하고 활기찬 사람이라면 아무런 관심이 없을 것이다.

다만.......

걸음이 느리고, 몸이 아픈 사람이라면 그 예쁜 것을 알아볼 시간적 여유가 있을 것이다.

이 못생긴 나무는 키가 작아서 나 같은 사람의 눈높이에 딱 맞도록 편안하게 봄을 감상할 수 있게 해주는 계절의 앨범이다.

달달하고 은근한 향기를 뿜어내는 예쁜 꽃.

달빛 아래 조용히 드러난 매화나무와 꽃봉오리의 실루엣을 본 적이 있는가.

아무도 없는 밤이어야 한다.

 

.............(정적).............

 

내 온 마음과 온몸으로 이것을 표현하고 싶다는 생의 의무 같은 것이 느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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