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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념의 통수

말뚝이의 일기

by 이말뚝 2023. 8. 11. 02: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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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정 아빠 기일이 되어 고향에 내려가 제사를 지냈다. 뭐 제사랄 것도 없고 그저 고인의 넋을 기리는 간단한 디너파티라고 보면 되겠다.

아빠가 돌아가시면서.. 아니, 이미 그전부터 재산 싸움으로 집안은 풍비박산이 나서 제사는 거의 지내지 않게 되었다. 그래도 조상 생각이 조금 난다면 성당에서 미사를 지내는 식으로 해당 날짜를 보냈다. 우리 형제들도 모두 결혼을 하여 집을 떠나면서 이런 제사는 더더욱 의미가 없어지게 되었고 남동생이 제사를 책임지게 되자 집에서 음식을 하며 제사를 지내는 관습은 사라지기 일보 직전이다.

그런데 왜 아직 사라지지 않았냐고? 엄마가 아직 살아계시기 때문이다.

여자에게 있어 시댁 문화는 지지리도 싫은 것이면서도 본인이 늙은이가 되자 생각이 달라지는지, 젊은 시절 고생했던 그 기억을 놓고 싶지 않은 모양이다. 제사 지내느라 고생했던 아픈 기억도 본인의 일생에서 가장 빛나는 순간이라는 생각이 드는지도 모를 일이다.

병원치료 때문에 계속 못 가다가 이제 조금씩 건강해지고 시간적 여유도 생겨서 제사에 참석했다. 하루하루 갈팡질팡하는 나의 마음을 다잡기 위해 하늘에 계신 아빠의 도움을 얻고 싶은 마음도 있었다. 먼 길을 달려가 아빠를 기리는 시간을 함께 하면 조금이라도 내게 좋은 일이 생기지 않을까 하는 이기적인 욕심 때문이다. 

우리 형제들의 계획은, 생전에 아빠가 좋아하시던 와인과 예쁜 디저트 등을 준비하여 제사상을 간단히 차리고 음복 후 밖에 가서 저녁 식사를 하자는 것이었다. 이제 다들 배우자와 함께 제사에 참석하기 때문에 형제자매라 해도 어쩌다가 한 번 보는 사이라서 서로 어색하고 머쓱한 게 사실이다. 최대한 빠른 시간 내에, 그 누구의 노동도 없이, 편한 기억만 남기고 싶어서 그런 절차를 생각해 낸 것이다.

문제는... 제사 간편화를 위한 실질적인 행동을 그 누구도 하지 않은 것이다.

고향집에 일찍 내려가 있던 엄마는 혼자 시장에 가서 이것저것 음식 재료들을 사와 이 더운 날 지지고 볶고 요리를 벌려 놓았다. 뒤늦게 고향집에 도착한 나는 움찔했다. 온 집 안에 가득한 음식 냄새와 그 음식 냄새를 빨아들여 다시 온 집안 구석구석으로 보내는, 더운 바람만 뱉어 내는 에어컨이 윙윙 거리는 모습을 보고,

'어, 이건 뭔가 잘못되었다'라며 중얼거렸다.

남동생 부부는 즐거운 주말을 보내느라 고향에 없었고 여동생 부부는 일하느라 바빠서, 나는 기차 타고 가느라 그 자리에 없었다. 엄마는 먼 길 달려오는 딸과 자녀 부부들을 위해 음식을 마련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나는 내 마음대로 제사문화의 혁신을 상상하기만 하고 현실은 그렇지 않은 것을 알게 되자 또라이처럼 승질을 내었다.

'엄마, 이게 또 뭐야. 이 더운 날 왜 요리를 하는 거야. 음식 냄새 봐봐. 이 더운 날 환장하겠네. 설거지는 누가 해. 서로서로 힘든 일은 만들지 말자니까. 올케가 일하면 나도 일어나서 일해야 하잖아.'

온갖 지랄을 떨었다.

이 노인네가 가만히 있을 사람이 아니지.

같이 자리에 앉아 한참을 싸웠다.

'그럼, 사람이 모이는 데 어떻게 아무것도 안 하고 있나.'

'음식 하지 말고 간단하게 와인 올리고 식사는 밖에서 하자고 했잖아.' 

'와인 같은 소리 하고 자빠졌네. 사람이 모이면 뭐라도 먹고 그런 게 있어야지. 디저트는 뭔 디저트. 같잖은 소리 하지마라.'

'그동안 안 하던 제사 음식을 왜 갑자기 하고 그래. 오는 사람들 부담스럽게. 이거 봐봐, 이렇게 해놔도 먹지도 않아. 그리고 여기 100% 엄마 집도 아닌데 왜 시키지도 않은 짓을 해.(올케의 지분이 많이 들어가 있음) 벽에다 못은 왜 박은 거야? 하지 말라는 짓은 좀 하지 마. 창고에 있던 곰팡이 슨 액자는 또 뭐야? 이걸 왜 여기다 걸어놔! 못 박고 곰팡이 슬어서 불긋불긋한 것을 걸어 놓는 게 얼마나 좋지 않은 행동인지 모르는 거야? 맨날 아들아들 하면서 아들한테 안 좋은 영향이 가는 짓을 엄마가 앞장서서 하면 어떡해!...'

뭐 대충 이런 식으로 대화가 흘러갔다.

서로 소리를 지르고 생 난리를 쳤더니 엄마도 나도 머리가 하얘져서 입을 다물어 버렸다.

 

내가 빡쳤던 포인트는, 노인네의 그 지긋지긋한 고집불통과 자기만 옳다는 이상한 자존심이다.

올케에 대한 치기어린 경쟁심도 포함된다.(이 부분이 정말 싫다. 나 또한 며느리니까.)

 

그리고,

 

나의 강력한 단점이 이 노인네에게서 기인되었다는 사실에 큰 충격을 받았다.

되지도 않는 억지를 쓰는 진상의 모습.

상대방에게 반박할 수 없을 때, '싫으면 오지 마라. 싫으면 하지 마라. 내가 다 한다.'라며 큰소리치는 허풍 말이다.

결국은 혼자 할 수 없으면서 생떼를 쓰는 모습, 우리 신랑이 치를 떨며 싫어하는 바로 그 모습이다.

내 나름 공부도 했고, 하는 일도 있고, 머리도 좋은, 인텔리 여성이라는 착각이 와장창 사라지고, 선명한 거울을 정면에서 마주 보는 꿈같은 일이 벌어진 것이다.

 

'나의 모습이 저렇게 노인의 형상으로 내 앞에 서 있구나'하고 정신이 살짝 멍해졌다.

 

유전자의 힘을 맹신하는 나의 바보 같은 신념에 의해 뒤통수를 제대로 맞았다.

신념이란 얼마나 웃기는 것이냔 말이다.

나의 부모에게서 받은 좋은 점만 가진 '난 씹 쿨한 여자'라는 생각만 평생하고 있었는데...

그들의 나쁜 점도 그대로 물려받았다는 사실을 난 왜 한 번도 생각해 본 적이 없을까.

(나의 과대망상증이 조금은 치유되는 순간이다.)

 

내 단점을 닮은 자식을 보면 그렇게 화가 난다던데,

그보다 더 열받는 건 부모에게서 내 모습을 발견하는 것이다.

이 충격적인 신선함.

이 파동은 내 삶에서 상당기간 동안 울려 퍼질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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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는 안 볼 것처럼 서로 물어뜯고 싸우다가 다음날 아무렇지도 않은 척 된장찌개에 밥을 같이 비벼먹었다.

그리고 새로 구입한 원적외선기기를 엄마방에 설치해드리고 따끈따끈하게 치료받도록 도와드렸다.

노인네가 짐싸서 가버리나 살짝 걱정했는데 내가 하는대로 가만히 있더라.

이렇게 하루가 저문다. 

'어쨌든 아프지 마시오. 노인네 당신이 아프면 내가 너무 힘들어지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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