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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끄러웠겠지만 별로 죄송하지는 않습니다

말뚝이의 일기

by 이말뚝 2023. 10. 11. 00: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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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년 만에 100호 왁구를 만들어보았다.

공간이 없어서, 피곤해서, 뭘 그릴지 몰라서, 애들이 있어서, 남편이 있어서, 시댁에 가야 해서, 전화받아야 해서, 힘이 없어서, 너무 시끄러워서..

못했다.

이것 말고도 3,752가지의 핑계를 더 댈 수 있다.

겹겹이 비닐봉지로 쌓여있던 100호 왁구를 꺼낸 것도 최근이다. 20년 전에 사두고 그림을 그렸다가 그림을 뜯어내 버리고 나무틀만 보관하고 있었다. 버리기는 아까웠다. 그렇다고 뭘 하지도 않았다. 먼지 쌓인 비닐 포장을 보는 것만으로도 피곤해져서 무기력하게 바라보기만 했다.

작업실에서는 항상 조용하게만 있었다. 소리 없이 작업하는 것만 하다 보니 이런 커다란 덩치를 가진 장비를 사용하고 싶지가 않았다. 20년 간 사회의 소음에 시달리고 이제는 병이 들어 그 어떤 소음도 나 스스로 만들어내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전화벨 소리도 끔찍하게 싫어하는 내가 오죽하겠는가.

어느 순간 마음을 정했다.

이제 작업실을 정리할 때가 왔다.

이런 때는 갑작스레 찾아오고 스스로 그 순간임을 깨달을 수 있다.

이 작업실은, 수익창출이 되지 않아 자생력을 잃어버린 공간이다. 꿈이라는 허황함은 현실을 헤쳐나갈 힘이 없다. 생존을 위해 사용해야 할 달란트를 더 이상 고갈할 수 없는 지경에 온 것이다.

작업실을 정리하기까지 몇 달의 시간을 남겨두기로 했다. 끝을 정해두니 지금 내가 해야 할 일이 명확해졌다. 작업실이 없어진다면 앞으로 할 수 없을 이 대형 왁구를 한 번은 만들어보고 끝을 내야 후회를 하지 않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사실, 왁구도 싫고, 물감도 싫다. 힘들게 커다란 대작을 만드는 것도 지쳤다. 지칠 만큼 많은 그림을 그리기도 했다. 내가 그렸던 것에 대해 미련 따위는 없다. 학부 때 그렸던 그림들은 어느새 다 없어졌다. 졸업 후 간간히 그렸던 그림도 내 손으로 버렸다. 어디 그림뿐이겠는가. 가체머리 실험하느라 만들어두었던 달비들도 다 버렸다. 그 많은 달비를 걸어두었던 행거 스탠드도 버렸다.

하지만 작업실이 존재하는 한 나는 쓰레기를 끊임없이  만들 것이다. 지금도 만들고 있는 중이다. 집에서도 만들고 있다.

세상에.. 세상에... 이런 형벌이 있을까. 끊임없이 노동하지 않으면 견딜 수 없는 일개미 중독증. 마약 환자 수준이다. 땅만 보고 살다 보니 하늘이 어떻게 생긴지도 모르고, 옆에 누가 있는지도 모르겠다. 사람에 대한 무심한 듯 공허한 태도 때문에 누구도 곁에 두지 않는다. 정말 불. 편. 하. 다.

 

팔리지 않는 물건들을 꾸준히 만드는 이유는, 나를 더 알고 싶기 때문이다.

내가 무슨 색을 좋아하는지, 물질을 대하는 나의 태도가 어떠한지, 물질을 가공할 때 나의 지향점은 무엇인지... 다 궁금했다. 이 나이 먹도록 나에 대한 정보가 너무도 없다. 나를 너무 버려두고 있었다. 내 안에 가진 목소리를 못 들은 체하고 심지어 '네 생각은 틀렸을 거야'라며 항상 내 안의 목소리를 함구하기까지 했다. 남의 소리 듣느라 나를 쓰레기통에 넣고 뚜껑을 닫고 있었다. 커다란 파도처럼 나를 향해 덮쳐오는 남의 목소리를 거부할 힘이 없었고 그저 남의 목소리에 이리 떠밀리고 저리 떠밀리며 바보처럼 지냈다. 내가 진작 끌어안아야 할 사람들에게 온갖 스트레스를 풀고는 밖에서는 허허실실 각설이 타령을 하고 다녔다. 그럴수록 내 꼴은 우스워졌고 남의 목소리는 나를 더 옥죄었다. '너는 내가 없으면 안 돼'라며 끊임없이 나를 흔들어댔다. 그 목소리는, 내가 정신적으로 정말 힘들고 힘들었던 그 결정적인 시기에 내 발목을 멋지게 걸어 넘겼다.

그렇게 난 넘어졌다.

내 인생에서 남의 소리를 걷어내는데 상당한 시간이 걸렸고 아주 큰 용기가 필요했다. 그 괴로운 과정에서 나는 병에 걸렸다. 암이라는 녀석이 꽤 골치 아프긴 했지만 내 인생에서 꿈같은 공백기를 만들어 준 고마운 것이기도 하다.

 

 

최근 찾아낸 정보다.

나는 흰 무명천 같은 담백한 느낌을 좋아한다.

작은 성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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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녀석을 만드느라 온 건물이 짜르르 울리도록 망치질을 해서 소음을 일으켰다.

절간 같은 이 건물을 같이 사용하는 이웃들께 진심으로 죄송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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