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 시절의 친구는 그 관계가 유지되기 힘들다.
서로의 삶의 궤적이 너무나 다르기 때문이다.
친구가 될 당시 삶의 방향성을 공유하는 대략 10년 정도의 시간이 지나고 나면
땅이 갈라지듯 점점 멀어지는 서로를 관망하게 된다.
이쪽에서 던진 한 마디가 섭섭하고, 저쪽에서 던진 한 마디가 기분나쁘다.
멀리서 바라보기 때문에 서로의 자세한 사정을 알 수 없고, 의견을 적극적으로 표시하는 쪽과 서운한 마음을 누르고만 있는 쪽이 있다면 그 관계의 갭은 더욱더 벌어지게 된다.
화해의 조각배를 타고 적극적으로 노를 저어 다가가준다면 그 관계는 어느 정도 유지될 수 있다.
하지만 일상이 너무나 숨가쁜 생활인의 삶 속에서 그런 여유를 부릴 수 있는 사람이 과연 몇이나 될까?
한 쪽에서 적극적으로 끌어당길 수도 있다.
관계의 틈을 메꾸기 위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모습을 볼 수 있는데, 이때 자주 등장하는 말이 "내가 아는데 말이야.." 이다.
육아를 해봐서 아는데 말이야, 내가 집을 구해봐서 아는데 말이야, 내가 직장생활을 해봐서 아는데 말이야, 결혼을 잘 알 아는데 말이야...
대화에 참가한 패널들의 삶의 조건이 동일하지 않기 때문에 저런 대화가 나온다.
네가 알지 못한 세계를 나는 미리 경험했다는 사실을 계속 인지시키며 한쪽을 대화에서 소외되게 만든다.
여기에서 관계의 우위를 점하는 일종의 권력이 발생하는 것이다.
큰 아이가 5살 쯤 되었을 때 지인이 주최하는 아이들 파티에 참여한 적이 있었다. 아이만 참여하는 곳이라 어떻게 진행되는지 알 수 없었지만 즐거운 시간이 되었을 거라는 생각만 가졌다. 큰 아이를 파티에 보내고 울며 보채는 작은 아이를 안고 그 주변을 맴돌았던 서글픈 기억이 난다. 파티가 끝나고 큰 아이를 데리러 갔을 때 , 지인이 내 앞에서 아이에게 이런 말을 하였다. "얘, 너 이렇게 크면 안돼." 라며 오른쪽 둘째 손가락을 꼿꼿이 펴서 좌우로 저었다. 유난히 내성적인 아이라 파티 내내 한 마디 하지 않았을 것이고 활동도 적극적이지 않아서 했던 말인 것 같았다. 난 그 자리에 서서 아무말 하지 못했다. 파티 장면을 경험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또한 그 지인은 아이를 낳아본 적도 키워본 적도 없었기에 나는 아무 말 하지 않았다. 경험의 차이는 대화를 멈추게 한다.
1년 전 작업실을 구하기 위해 이리저리 알아보고 있을 때였다. 여기서 또 지인 등장. "작업실을 구하게 되면 거기서 많은 시간을 보내게 될 거야." "온전히 너의 시간 공간이기 때문에 집보다 더 편한 공간이 될 거야." "작업실을 예쁘게 꾸미고 싶을 거야." "집 계약하기 전에 나한테 연락먼저 하고."...
내가 작업실을 구하는데 그 지인이 무슨 도움을 줄 수 있다는 건지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내가 계약한 작업실은 집에서 거리가 있어서 자주 갈 곳이 아니었다. 주거가 가능한 투룸이지만 넘쳐나는 작업결과물과 재료들을 보관하는 창고 용도로 사용할 생각 뿐이었다. 나에게 뭔가 해줄 말이 많았겠지만, 다소 선을 넘는다는 느낌이 들었다. 지인의 말이 완전 틀린 것은 아니기에 조용히 듣고만 있었다. 말없이 경청하고있는 상대는 최고의 파트너가 될 수 있다. 그렇게 한쪽이 마음편한 대화의 시간은 점점 길어지고 있었다.
2년째 작업실을 유지하고 있는데... 월세를 공중에 뿌리며 돈지랄 중이다. 하지만 여전히 그곳을 창고로 사용하고 있으며 나의 혼이 담긴 작업실로 예쁘게 꾸밀 생각은 전혀 없다.
20년 간의 직장생활은 나에게 병을 남길만큼 스트레스 가득한 나날들이었다. 그 모습을 지켜본 지인은 내 모습이 안타까웠는지 이제 그만두고 퇴직 파티를 하자고 했다. 얼마되지도 않는 돈 벌면서 그렇게 힘들어야 하냐고 안쓰러워했다. 자기가 한창 돈 벌 때 그 정도 버는 건 어렵지 않았다고 하면서... 그 지인이 어떻게 돈을 벌었는지 난 잘 모른다. 그 지인처럼 많은 돈을 벌어본 경험이 없기에 난 입을 다물고 가만히 듣고만 있었다. 직장 생활을 통해 얻어지는 부분이 있었지만 이또한 지인이 경험해보지 못한 것이기에 나는 입을 다물고 말았다. 대화의 정적이 생기는 것을 원치 않았기 때문이다. 대화를 계속하며 그 지인은 자기와 아주 가까운 사람이 건강보험료를 몇 십만원 낸다는 이야기를 하였다. 난 또 입을 다물었다. 내 월급명세서에서 건강보험료가 얼마 빠져나가는지 기억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능력있는 지인을 두었구나. 좋겠다~~ 불쌍하게 돈 버는 나... 얼마되지도 않는 그 돈을 벌어야 하겠기에 난 월급노예를 계속하고 싶다.
시댁 식구들과 불편한 일이 생겼을 때 지인과 전화통화를 하며 수다를 떤 적이 있었다. 내 상황에 눈물을 질금거리며 대화를 하다가 이윽고 그 지인도 자신의 경험담을 풀기 시작했다. 식구들 사이에서 이러이러한 일이 발생했는데 관망하는 입장에서 뭔가 짚고 넘어가야하는 타이밍인 것 같다는 등의 이야기였다. 난 결혼한 입장에서 식구 간의 갈등을 경험한 것이지, 결혼하지 않은 입장에서 식구 간의 갈등을 경험한 것이 아니기에 입을 다물었다. 관망하는 입장에서 무슨 말을 하고 집안 분위기를 어떻게 정리해야겠다는 건지 이해가 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경험이 없기에 입을 다무는 것이 낫겠다는 생각을 했다.
관계망 속에서 시달리는 내 감정과, 관망하는 입장에서 마음이 불편한 지인의 감정에는 분명한 차이가 있었기 때문이다.
쏟아내는 대화의 양으로 관계의 우위가 형성될 수 있다.
관계의 우위는 상대방에게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다고 믿게 한다.
그 믿음은 나 스스로를 굉장히 중요한 사람으로 여기게 만든다.
수다일뿐 대화가 아니었다.
대화를 출력해내기 위한 투쟁의 시간이었고 조금이라도 우위를 점하고 싶은 욕망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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