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편은 나에게 바람막이 같은 사람이다.
숫자에 어둡고 인간관계에 약삭빠르지 못한 나의 어리석은 부분들을 상당히 보완해주고, 사회의 거친 바람에 이리저리 굴러다니지 않도록 나를 꽉! 잡아주는 고마운 사람이다.
그러나.. 언제나 양면성이 있는 법.
상상에 의지하며 미래에 있을 일들을 그림 그리듯 설계해보는 나의 성향은, 남편의 정확한 이성의 칼날에 싹둑~ 싹둑~ 가지치기를 당할 때가 많다.
몽상가 기질이 강한 사람의 머릿속은 대부분 잡생각으로 가득 차 있기 때문에 그것을 솎아내 주는 타인의 손길이 개운하지만... 또... 너무 속상하기도 하다.
뭉게뭉게 피어나는 잡생각들끼리 어느 순간 스파크를 일으키며 막강한 통찰의 순간으로 다가올 때가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남편은 가차 없다.
남편에 의해 청소기로 사정없이 빨려 들어가는 이 먼지 귀신들을 안타깝게 바라볼 뿐이다.
요양병원 퇴소 후 집에 오는 날부터 이런 일이 더 잦아지고 그 위세가 강력해지고 있다.
심지어, 달비를 만들기 위해 빗질하는 모습이 조금이라도 보이면 남편의 눈빛이 달라져서 나는 그만 움찔해하며 도구들을 얼른 치운다.
남편은 내가 아픈 게 이 머리 작업들 때문이라는 생각을 하는 것 같았다.
근 2년을 머리 작업에 푹 빠져 살았고 그로 인해 가정살림, 애들, 남편을 돌보는 게 소홀하긴 했다.
아니다.
밥벌이를 하며 머리 작업에 나의 모든 에너지를 쏟아부어서 식구들을 위한 애정을 표현할 힘이 없었을 뿐이다.
(나의 주위에 포진해 있던 에너지 뱀파이어들도 한몫했다)
남편은 벌써 파악했다.
내 사업체의 손익분기점은 절대 오지 않을 거라는 걸..
그리고, 제품을 만들수록 손해라는 사실도 이미 알고 있었다.
그래서 와이프가 큰 병을 얻고 치료를 받는 중에도 머리 작업에 손을 대고 있는 걸 보면 화가 치미는 것이다.
'당장 집어치우라'라고 소리치고 싶은 걸 겨우 참고 있다는 사실을 내가 왜 모르겠는가..
하지만... 그래도...
난 이 작업을 계속하고 싶다.
정말 미련하기도 하지.
이렇게 된 이상...
남편 눈에 띄지 않도록 좀 더 여우같이 기민하게 움직이는 수밖에 없다.
항암치료, 수술, 요양병원 같은 굵직굵직한 일정을 모두 소화한 지금 나는 조금 건강해졌다.
아직 방사선을 비롯한 몇 가지 치료가 남아있긴 하지만, 나의 컨디션이 수술 전보다는 나아진 느낌이다~^^
어제는 퇴근한 남편 옆에 앉아 이것저것 말도 걸어보고 달고 맛있는 귤을 깨끗하게 까서 정성스럽게 서빙해주었다.
오랜만에 와이프의 관심과 애정 어린 손길을 받아서인지 딱딱하게 굳어있던 표정이 풀어지고 얼굴색이 핑크색으로 밝아지는 게 아닌가~
나의 빈자리로 인해
그동안 남편도 많이 힘들었던 것이다.
나는 깨달았다.
남편이 원하는 것은 둘 중 하나이다.
1) 자기를 잘 보살펴주는 와이프
2) 돈을 엄청나게 잘 벌어서 가장 역할을 자기 대신해주는 와이프
내가 아직은 남편과 서로 잘 지낼 방법을 찾아야 하는데...
당연히 2번 방향을 지향하고 싶지만 시간이 걸리는 관계로, 당분간 1번 방향의 삶의 모습을 보여줘야 한다.
평화로운 가정생활은 내 인생에 있어 정말 정말!! 중요하다.
남편이 원하는 것을 잘 알아내고 그것을 만족시키며,
좀 더 전략적으로 남편과의 평화적 전선을 구축해가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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