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목요일이다.
하루 종일 집에 누워있다가 이대로 돼지가 될 수 없다는 절실함이 들어 겨우 몸을 일으켜 산책을 나섰다.
밤 11시 정도. 연일 추운 날씨와 악천후로 바깥을 돌아다니는 사람은 없었다. 종종걸음으로 30분 정도 산책을 한 후 집으로 가기 위해 바삐 걸었다.
한참을 걸어가다보니 왼편으로 길바닥에 시커먼 물체가 길쭉하게 놓여있는 게 보였다. 눈이 쌓여서 꽁꽁 언 길 위에 누가 이런 짐을 놓고 갔을까 싶었다. 하지만... 뭔가 싸한 느낌이 들어 걸음을 멈추고 살펴봤더니 사람이 아닌가!
깜짝 놀랐다.
손가락으로 슬쩍 밀어보니 움쩍 하며 고개를 돌린다. 젊은 남성이었는데 술이 너무 취해서 몸을 가눌 수 없는 지경이었다.
우리 집에 있는 남의 편 덕분에 많이 경험했던, 알코올에 듬뿍 절은 눈빛을 보고 그 상태를 짐작할 수 있었다.
이렇게 길바닥에 누워있다가는 큰일이 날 것만 같았다.
누워있는 자세로 보았을 때 택시를 타고 겨우겨우 아파트로 들어왔는데 횡설수설하는 손님 입에서 흘러나오는 단어의 끝자락을 듣고 비슷한 동 앞에 내려준 것 같았다. 이 남성은 차에서 내리면서(아니면 택시 기사가 내려준 건지 모르겠지만) 잠시 서 있다가 그대로 땅으로 엎어진 모습이었다. 핸드폰도 1m 멀리 내동댕이 쳐 있었다. 이렇게 술에 취했을 때는 감각이 무뎌져서 아픈지도, 추운지도 모른다. 얼마나 위험한가 말이다.
경비실로 달려가서 아저씨를 데려올까 생각해보았다. 직장 짬바로 시뮬레이션을 급히 돌려보니, 이 한밤 중에 취객 민원이 접수되면 그 아저씨도 얼마나 귀찮고 짜증날까 싶었다. 분명 아파트 주민인 것 같은데 내가 이 남성을 집으로 돌려보낼 수 있겠다는 이상한 용기가 생겨났다. 이러면 안 되는데 말이다.
땅바닥에 떨어진 핸드폰을 주워서 남성의 손에 쥐어주었다. 핸드폰 패턴을 풀어보라고 크게 말했다. 비틀비틀하며 패턴을 겨우 풀었다. 전화번호부를 뒤져서 '엄마', '아빠'라고 되어있는 번호로 전화를 걸었다. 몇 번의 통화끝에 '아빠'와 통화를 하고 이 남성의 아내와 통화를 한 뒤, 아내과 함께 이 남성을 부축하여 집 현관문 앞까지 가서 집으로 돌아왔다.
이 행위의 절차를 간단히 서술했기 때문에 모든 것이 일사천리로 진행된 듯 하지만, 중간중간 어려움이 많았다.
나에겐 이 남성을 일으킬 힘이 없어서 아내가 올 때까지 땅바닥에 누운 그를 지켜보는 수밖에 없었다. 추웠다.
집에 이 남성을 밀어넣고 급히 나오려는데, 아내는 나를 불러 세워서 번호를 달라고 했다. 아니라고 한사코 거절하고 나오는데 엘리베이터에 타고 나를 따라오려는 게 아닌가. 술 취한 남편을 빨리 챙겨야 할 텐데 나를 따라오면 시간이 지체될 것 같아서 얼른 내 번호를 불러주고 집으로 돌아왔다.
집으로 돌아오니 그 사이에 처음보는 번호로 부재중 통화가 와 있었다.
느낌에 아내의 번호인 것 같았는데... 뭔가 좀 의아했다.
고맙다는 소리를 할려면 보통 다음날 하는 게 맞잖아. 바로 전화하지는 않는다고.
누워서 횡설수설하는 남편의 눈에 젖은 옷을 갈아입히느라 바빴을 텐데 이건 아닌 거지.
뭔가 나에게 확인을 요구하는 전화였을 확률이 엄청 높다.
뭐지?
번뜩 스쳐가는 생각에...
남편 패딩점퍼에 넣어둔 지갑이 없어져서 나에게 전화를 했을 거라는 느낌이 들었다.
(이렇게 순간적으로 스쳐가는 느낌이 맞을 때가 많다는 게 조금 슬픈 일이지...)
아내는 길바닥에 누워있는 남편과 나 찾기까지 시간이 걸렸다.
그 시간 동안 내가 자기 남편의 전화기를 열어보고 지갑까지 손을 댔다고 생각하는 게 아닐까.
또 나의 머릿속에서 여러 가지 시뮬레이션이 돌아간다. (온통 잡생각)
아내는 시아버지인 '아빠'에게 전화를 걸어, 남편의 지갑이 없어졌다는 이야기를 한다. 혹시나 내가 그 지갑에 손을 댄 건 아닐까 전화를 했지만 내가 전화를 받지 않아서 이런 사실 확인이 되지 않는다고 한다. '아빠'는 잠시 고민하다가 도와준 의도는 모르겠지만 그래도 큰 도움을 줬는데 이 늦은 밤에 그런 확인 전화를 하는 건 아닌 것 같다고 며느리를 달랜다. 아내는 남편을 챙긴 후 다시 밖으로 나와 남편이 누워있던 자리로 가본다. 역시 지갑은 그 자리에 없다. 아내의 머릿속에서 택시 기사와 내가 용의선상에 오른다. 그중 나에게 더 큰 무게가 실린다.
(오~~~ 갓땜이다!!ㅠㅠ)
남성과 그의 아내를 도와준 이야기를 우리 집 남의 편에게 했더니, 다시는 그런 짓 하지 말라고 엄청나게 화를 낸다.
나는 입을 다물어 버렸다.
집 현관 앞까지 부축해줬다는 이야기를 했다가는, 우리 남의 편은 입에서 거품을 물 것 같았다.
그날 밤, 컴퓨터를 켜서 '고소 절차'에 대해 정보를 수집해보았다.
앞으로 내게 벌어질지도 모르는 일에 대해 마음의 준비를 하였다.ㅜㅜ 별 것 없었다. 경찰서, 검찰... 뭐... 차분한 마음으로 절차를 밟으면 되는 일이었다.
내일은 월요일이다.
진짜 어디서 전화오는 거 아님....ㅜㅜ;;;
앞으로 다시는 취객을 내가 직접 돕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
사건 이후 나흘 뒤에 그 남성으로부터 문자메시지가 하나 왔다.
뭐 간단히... 고맙다는 메시지였는데,
고맙다는 생각을 했던건지, 고소를 할려고 했던건지는 알 수 없으나,
그쪽에서 좋은 마음으로 마무리하려고 나름 애쓰는 모습에
나는 가슴을 쓸어내린다. 다행이다ㅠㅠ
난 내 방식대로 키운다, 난 할 수 있다 (2) | 2023.01.18 |
---|---|
싸늘하게 식은 닭강정 씹으며 마음 가라앉히기 (1) | 2023.01.12 |
참을 인 행성 g (0) | 2022.11.13 |
남편과의 평화적 전선 구축 (0) | 2022.10.05 |
비 내리는 밤 (0) | 2022.09.01 |
댓글 영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