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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장이 끝나고

말뚝이의 일기

by 이말뚝 2024. 11. 10. 1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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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로 다음날

11월 4일 월요일, 나의 첫 교육이 시작되었어.

그늘에서 겨우 숨만 쉬던 인간이 드디어 바깥 외출을 시작한 거지.

1년을 지지부진, 어영부영 시간만 죽이던 공인중개사 시험에 깔끔하게 떨어진 후 자격증 시험을 다시는 보지 않기로 결심했어.

 

자격증은 나에게 취미생활의 하나였어.

그 취미생활에 많은 시간과 노력을 투자하며 의미 없는 시간을 많이 소비했다는 걸 이제야 깨달았지. 미용사, 컬러리스트, (지금은 존재하지 않는) 컴퓨터 활용능력 자격증??, 괴상한 민간자격증, 바리스타.. 그런 것들 저런 것들 상장 같은 것들, 이제 책장에 꽂혀서 먼지만 쌓여 있어. 사실 이런 걸로 돈을 벌어야 한다는 절실한 생각을 해본 적도 없었어;; 그저 돈지랄이었다.

 

겨우 하나 가지고 있는 공무원 자격증으로 죽지 못해 근 20년을 이어왔지. 그것도 이젠 그만뒀다. 몸도 아프고 해서.

몸 아파서 받은 보험금으로 늙은 우리 엄마한테 그럴싸한 차 한 대 사줬다. 내가 성질이 더러워서 친정식구들에게 평생 도움이 된 적이 없었는데, 이거 하나만큼은 참 잘했다는 생각이 들어.

 

오늘 먼지 뒤집어쓰며, 무서운 소리가 나는 기계를 들고 단순 작업을 해보았다. 원래 단순하고 반복적인 일을 잘해서 그런가 오래간만에 쪼그리고 앉아 일을 해서 힘들긴 했지만, 오히려 마음이 개운한 거야. 집에 와서도 하나도 피곤하지 않아서 퇴근잠?도 안 자고 일기를 쓰는 건 내 생애 처음 있는 일이야. 놀라워.

 

주위에 공장이 많은 조금 황량한 곳이지만, 돌아가신 우리 아빠가 사업을 하셨던 환경과 너무 비슷해서 마치 엄마 뱃속에서 느꼈던 익숙함이랄까 그런 편안한 느낌이 들더라고.

아빠가 이와 비슷한 곳에서 악착같이 사업을 일으켜 나와 형제들을 공부시키기 위해 애쓰시는 모습이 그림처럼 내 눈앞에 펼쳐지는 거야. 본인 자손은 구리스 냄새나는 공장이 아닌 깔끔한 사무실에서 일하기를 간절히 바라셨을 거야.

 

세월이 지나 늙은 딸은 그곳에 다시 돌아오고 말았어. 아빠는 이런 내 모습을 어떻게 보고 계실까. "내가 너를 여사장으로 만들어주마" 하던 아빠의 꼬심을 단번에 거절했던 20대의 내가 참 맹랑하고 허무하다는 생각이 드네.

공장에서 돌아가는 엔진, 배선과 같은 어마어마하게 크고 복잡한 시설을 보면 나도 모르게 가슴이 떨리는 거 알아? 참 신기한 일이야.

 

나는 내일 차를 끌고 교육받으러 갈 거야. 내가 엄마한테 사준 차 말이야. 엄마한테는 미리 말해뒀지.

원래는 버스로 출퇴근을 할 계획이었는데, 오늘 한 번 해보고 완전 마음을 바꿨어. 직장인들, 학생들과 출근시간이 너무 겹치는 거야. 버스를 뒷문에서 올라타고 정류장마다 내렸다가 다시 올라타는 짓을 30년 만에 했더니... 와 이건 진짜 못할 짓인 거야. 기운이 너무 달려서 자차 운행하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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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주일 지난 지금 시점)

자차 운행 방침은 정말 잘한 짓이었다.

너무너무 개만족ㅠㅠ

늙고 왜소한 여자가 허름한 차림으로 바깥을 다녀야만 할 때

그럴싸한 자동차는 사회적인 보호막이 된다.

나는 이 번쩍이는 보호막 아래에서 조그맣게 숨을 쉬며 하루를 무사히 보내고 있다.

키 작고 늙은 여자들아.

돈 모아서 비싼 차사서 타고 다녀라.

강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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