팔자에 없는 공인중개사 시험을 보겠다고 작년 12월부터 설레발치며 학원을 다녔었다. 숫자와 텍스트에 최약체인 내가 법률용어로 가득 찬 책을 들여다보자니 이보다 더한 고역이 있었을까. 매일이 멘탈붕괴였지만 꾹 참고 다니며 수업을 따라가려고 애를 썼었지..
표준치료 후 호중구 수치가 회복되지 않아서 결국은 5월 중순, 학원을 포기하고 집에서 혼자 공부하기 시작했다. 먼지 날리는 더러운 교실 환경, 오직 송풍만 되는 30년은 넘어 보이는 에어컨, 겸손은 눈 씻고 찾아볼 수도 없는 아줌마들 무리에서 벗어나고 싶기도 했다.
한여름 땀을 뻘뻘 흘리며 기출문제집과 씨름하였다. 요즘은 공인중개사 문제가 너무 어려워져서 기출만 보면 안 된다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본 투 비 노베이스인 나에겐 달리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기출이라도 달달 외워야 할 지경이었다. 갑갑하고 눈물밖에 나지 않았지만 이미 시작한 거 끝은 봐야 했으니 어쩔 수 없이 계속했다. 몸이 아파서 달리 시간을 보낼 것이 없기도 했다.
6과목 기출문제와 해설을 한 글자도 빼놓지 않고 노트북으로 필사해 보았다. 너무 힘들어서 한숨만 나왔다. 두 달에 걸친 필사가 끝나고 나서 기출문제만 프린트하여 풀어보았다. 빗물과 태풍이 몰아치는 시험지.. 틀린 문제만 또 프린트해서 본다. 소나기가 내리지만 포기하지 않고 또 틀린 문제만 골라서 프린트해서 풀어보고, 또 풀어보고.. 다 맞을 때까지 재재재재 프린트해서 풀어보았다. 이 작업은 시험 2주를 앞두고 마무리되었다. 생각보다 빨리 끝나서 놀랍긴 했다. 이 과정에서 더블에이 A4 550매 3권을 프린트로 소모했다. 싸구려 A4용지 쓰면 떨어질까 봐 조금 비싼 거 썼다. 확실히 조금 더 비싼 게 좋더군.. 다이소 필기도구 쓰면 공부 안될까 봐 닥터들이 출입하는 빅 3 대학병원 내 문구점에서 볼펜과 샤프를 사기도 했지.ㅠㅠ
결과는?
당연히 불합격~
개론이 70점 나와서 나머지 과목도 그 정도 나올 줄 알았는데 웬걸 개론 제외 모든 과목이 45점 대인 거다. 그래도 혼자서 모의고사 한 번 치르지 않고 과락을 넘긴 게 대단하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위 사진을 보았는가. 집에 있는 작디작은 프린터를 혹사해 가며 프린트를 뽑아낸 결과물이다. 포스트잇을 붙이고 온갖 지랄 떨며 공부한 결과가 이렇게 되어 허무하긴 하더라.
35회 공인중개사 시험이 어려웠다는 둥 별소리가 다 있던데, 진심 살신성인으로 공부한 사람들은 그런 소리 절대 안 한다. 절대평가에서 커트라인을 못 넘겼다면 불평불만해서는 안 된다. 그냥 본인 공부가 부족했던 것을 인정해야지.
난 깨끗하게 인정한다. 내 공부가 부족했음을.
시험에 합격해도 문제다. 개공이니 소공이니... 내가 무슨 재주로 고객을 만나 설득하고 계약을 성사시킨단 말인가. 처음부터 잘하는 사람은 없다고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내가 이 길과 어울리지는 않더라는 거지. 전 직장도 사람이 징그럽고 싫어서 뛰쳐나온 건데 내가 지난 1년간 뭘 했던 건지... 미친 게 아닌가 싶더라고.
난 다른 길을 찾아 떠나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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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월 27일 합격자 발표 날
띵동 카톡 옴....
미쳤다리...
부동산개론 70점인 거는 가채점으로 알고 있었음.
민법 67번 이의신청 수락되어서 모두 정답처리.
35회 전 교과 통틀어
민법 67번 단 한 문제만 이의신청이 받아들여졌다고 함.
좀 전에 2차 교재 주문함.
찢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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